신세계

2026.03.20 00:27

트로이 목마는 이렇게 작동합니다 — 함돈균 발언의 해부

  • rexmarina 4일 전 2026.03.20 00:27 끌량 인기
  • 776
    2

트로이 목마는 이렇게 작동합니다 — 함돈균 발언의 해부

지난 3월 1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뉴이재명을 논하다' 토론회에서 문학평론가 함돈균 씨가 한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병자'로 규정하고, 검찰 개혁을 '노무현 트라우마의 소환'으로 격하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발언이 단순한 실언이나 논리적 실수가 아닌지, 다섯 가지 차원에서 차근차근 해부해 보겠습니다.


1. '그리움'을 병리화하는 오류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감정은 단순한 팬덤이 아닙니다.

그것은 검찰 권력에 의해 한 대통령이 죽음으로 내몰렸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정치적 기억입니다. 그 기억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박근혜 탄핵 광장에 나왔고, 윤석열 내란의 밤을 버텼으며, 마침내 검찰 개혁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함돈균 씨는 이 그리움을 '병리'로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감정 비판이 아닙니다. 정신의학적 언어를 정치적 공격 도구로 전용하는 것입니다. 과거 권위주의 체제가 반체제 인사를 '정신이상자'로 낙인찍던 방식과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는 문학평론가입니다. 인간의 상실과 그리움에 언어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본업인 사람이, 정치적 맥락에서는 그 동일한 그리움을 병리로 규정했습니다. 이것은 논리적 실수가 아니라, 언어를 아는 사람이 언어를 의도적으로 무기로 쓴 것입니다.


2. '다원주의 옹호자'의 자기모순

함돈균 씨는 평소 다원주의를 강조해왔습니다. 조국 대표와 김어준 씨의 '갈라치기'를 "독재적 언어"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민주주의의 본질은 관점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수백만 명의 감정적 정체성을 단 한 단어 '병자'로 묶어버리는 것은, 그 정의에 따르면 가장 강력한 형태의 갈라치기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다원주의를 내면화한 사람이었다면, 그 원칙은 자신의 발언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다원주의가 그에게 원칙이 아니라 특정 세력을 공격하기 위한 도구였음을 보여줍니다.

비판의 칼은 모든 방향에 동일하게 날카로워야 합니다. 한 방향으로만 날카로운 칼은 무기입니다.


3. 역사적 맥락의 의도적 단절

함돈균 씨는 검찰 개혁을 "20년 내내 실패만 한 노무현 트라우마"라고 규정했습니다.

이것은 교묘한 언어적 조작입니다.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검찰 개혁의 현재적 필요성과 구조적 근거는 사라지고,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거에 집착하는 비합리적 집단으로 자동 규정됩니다.

그러나 사실을 보겠습니다.

검찰 개혁이 20년간 살아남은 것은 노무현에 대한 감정 때문이 아닙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검찰 권력의 정치화가 실제로 심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윤석열이라는 인물 자체가 검찰 권력의 정치화가 낳은 가장 극적인 산물이었습니다. 그의 내란 시도는 검찰 개혁이 왜 필요한지를 역사상 가장 강력하게 증명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검찰 개혁 법안은 실제로 통과되었습니다. 20년의 노력이 마침내 입법적 성과로 이어진 것입니다. 실패의 역사만 부각하고 성취의 역사는 지워버리는 서술은 객관적 역사 인식이 아닙니다.

최강욱 전 의원이 "뉴라이트 발언 같았다"고 비판한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의도가 어떻든, 발언의 효과가 누구에게 이로운지를 따지는 것은 정치적 발언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4. '갈라치기 비판자'가 수행한 가장 심각한 갈라치기

이 토론회가 만들어낸 가장 위험한 구도는 이재명 지지자들을 '뉴이재명'과 '올드이재명'으로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새로운 지지층을 환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기존 핵심 지지층을 병리화하면서 새로운 지지층을 우월한 존재로 대비시키는 구도입니다.

새로운 지지자를 진정으로 늘리고 싶다면, 기존 지지자를 존중하면서 포용해야 합니다. 기존 지지자를 병자로 규정하면서 새 지지자를 환영하는 방식은 포용이 아니라 대체이며, 분열이 목적이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구도입니다.

그가 비판한 갈라치기와 그가 실제로 행한 갈라치기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도 있습니다. 의견의 차이는 토론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과 정체성을 병리로 규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훨씬 더 폭력적인 행위입니다.


5. 트로이 목마는 이렇게 작동합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 하필 이언주 의원이 주최한 자리였는가.

이언주 의원의 정치적 궤적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민주당에서 출발해 국민의당, 바른미래당, 미래통합당을 거쳐 보수 진영에서 활동하다 다시 민주당으로 돌아온 인물입니다. 이승만·박정희 칭송 강연 논란까지 있는 인물이 '뉴이재명'이라는 간판을 달고 토론회를 주최했습니다.

트로이 목마의 핵심은 적이 아군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적이 공격하면 사람들은 결집합니다. 그러나 내부에서 '우리 편'을 자처하며 핵심 지지층을 병리화하고, 역사적 성취를 지우고, 정체성을 해체하면 훨씬 효과적으로 조직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함돈균 씨가 이언주 의원의 정치적 성격과 이 자리의 의도를 몰랐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그가 평소 정치적 맥락과 언어의 구조를 날카롭게 분석하는 인물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알면서도 그 자리에 섰다면 그것은 공모이고, 정말 몰랐다면 그것은 그가 그토록 강조해온 비판적 사유의 심각한 결여입니다. 어느 쪽이든 그에게 유리한 해석이 아닙니다.


정리하자면

다섯 가지를 종합하면 하나의 일관된 그림이 완성됩니다.

그리움의 병리화는 핵심 지지층의 감정적 정체성을 무너뜨리고, 다원주의의 자기모순은 그 공격에 지적 위장막을 제공하며, 역사적 맥락의 단절은 핵심 지지층이 이룬 성취를 지우고, 갈라치기 비판자의 갈라치기는 진영 내부를 실제로 분열시키며, 이 모든 것이 이언주라는 무대 위에서 펼쳐졌습니다.

이것이 우연한 논리적 실수들의 집합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마무리하겠습니다.

민주당과 이재명 대통령을 진정으로 지지한다면, 그 지지의 뿌리가 된 사람들을 병자로 불러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납득할 만한 답이 없다는 것이 이 발언의 본질입니다.

원문 보러가기

  • 공유링크 복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